라쇼몽(羅城門) 효과란? (See What I Wanna See)

2020. 12. 31. 13:54라이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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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쇼몽 영화 포스터

흔히 말하는 '라쇼몽' 효과에서 라쇼몽 이라 함은 1950년대 발표한 일본 영화 제목을 말합니다. 동명의 소설(마찬가지로 일본 소설, 1915년)도 있지만 흔히 얘기하는 라쇼몽은 영화의 라쇼몽이라고 보면 됩니다.

발음도 생경하고, 잘 쓰는 말도 아닌 라쇼몽이 왜 회자되고, 우리가 철지난 옛 일본 영화를 알아야 하는지도 의문인 분들도 많겠지만, 라쇼몽 현상은 인간사회를 관류하는 서글픈 논제일 겁니다.

누구 얘기가 믿을만 합니까?

'사무라이'(남편)와 '아내'가 있습니다.
사무라이의 아내는 악명 높은 도적 '다조마루'에게 겁탈을 당합니다. 사무라이가 보고 있는 상황에서요.
이후, 사무라이는 도적에게 단도에 찔려 죽고, 사무라이의 아내는 달아납니다.

그리고, 이 상황을 목격한 나무꾼이 있었습니다.

 

영화를 다 보고 나서의 전체적인 줄거리는 위와 같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시쳇말로 '대환장 파티'가 벌어집니다. 사건은 아내가 겁탈당하고, 사무라이 본인이 죽은 하나의 '실체'만 존재하지만, 그 사건에 대한 증언은 각자의 입장에 따라 달라집니다.

 

사나이 답게 일합을 겨루는 도적과 사무라이

도적의 입장 : 사무라이의 아내를 보고 반해버려, 사무라이를 꾀어 함정에 빠뜨리고(나무에 묶고) 아내를 사무라이가 있는 곳까지 데리고 옴. 사무라이와 그의 아내를 두고 정정당당하게 (멋지게) 결투하여 승리하고 아내를 차지하려 했으나 아내는 도망감. 

아내의 입장 : 도적(다조마루)에게 겁탈당함. 겁탈당한 자신을 보는 남편의 눈빛이 싸늘하게 변해 자기를 단도로 죽여달라고 함. 그리고 기절. 깨어났을 때는 남편은 단도로 죽어있었고, 그 이후 자살하려 했으나 실패함

 

사무라이의 입장 : (이미 죽었지만) 무녀에게 빙의해 말함. 겁탈당한 후 아내가 황홀한 눈빛으로 도적을 바라보고 있었음. 아내는 도적에게 자기(사무라이)를 죽이라고 다그치자 도적은 그런 아내가 괘씸해 아내를 죽일지 살릴지를 사무라이에게 물어 봄. 그러던 사이 아내는 도망가고, 자괴감과 배신감에 본인(사무라이)은 떨어져 있던 단도로 자결함.

 

나무꾼 입장 : 도적이 아내를 겁탈 후 결혼하자고 하였으나 아내는 남자들끼리 결투를 하라고 함. 사무라이는 정절을 버린 아내 때문에 목숨을 걸고 싶지 않다고 함. 겁탈한 도적도 싫증이 나버림(현타). 아내는 이런 남자들을 보고 돌변하여 싸움을 부추김. 도적과 사무라이는 얼떨결에 싸움을 하긴 했는데, 멋지기는 커녕 진흙탕 개싸움을 함. 도적은 얼떨결에 사무라이를 죽이게 됨. 남편이 죽자 여자는 도망감. 

이렇게 4명의 진술이 하나같이 자신의 입장을 '포장'하려는(정당화 하려는) 측면에서 사건은 하나이지만 왜곡된 진술을 하게 됩니다.

반전은, 그 사건의 목격자인 나무꾼 조차도 사무라이의 가슴에 꽂힌 단도(은장도)를 가져다 팔려고 관아에 가서 증언할 때는 단도 얘기는 쏙 빼놓고 얘기한다는 겁니다. 

 

'SEE WHAT I WANNA SEE'

라쇼몽을 모티브로 만든 뮤지컬 이름입니다. 옛날 정약용 선생이 어디에선가 세상만사 다 '밥그릇 싸움'이라고 했다는데, 같은 맥락이 아닐까 싶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진실을 말하고, 정의를 말하지만 사실은 내 입장, 내 편에서의 정의 내 편에서의 진실, 내게 도움이 되는 사실(이라고 믿는 가공된 사실)만을 얘기합니다. 사건은 하나인데 누구 편인가에 따라 정의가 되기도 하고 불의가 되기도 합니다. 

진실, 진리, 사실이라는 것이 존재하기는 할까요?

기술이 발전됨에 따라 개인의 의사를 표현하는 방법도 다양해졌습니다. 그 만큼 진실도 진리도 사실도 다양해 졌습니다. 우리 사회가 그만큼 더 발전하고 있는지는 의문입니다. 우리는 이제 어떤 세상을 살아가게 될까요?

 

오늘 포스팅은 여기까지 입니다. 행복한 하루를 보내는 것이 생의 본질에 더 가까워지는 것은 틀림없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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